+슈톨렌이 저쪽 세계에 남지 않고 돌아오는 하나의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
+로우 위가 검열삭제된 세계이기 때문에 슈톨렌은 로우 위에 대한 건 완벽하게 잊고 있음
+엔딩 이후 시점.
+로우 위님... 안나와....ㅇ<-<
+캐붕
+커플은 딱히 없는데 로우슈톨에 가깝...나?
+하이선지는 공식이니까 딱히 표기하지 않습니다. 그 둘이 중점이 되는 이야기도 아니라ㅠㅠㅠㅠ
Prologue
세계가 무너져간다.
자기 할 말을 마친 발렌타인이 눈을 감았다. 그 모습이 노이즈에 감싸여 보이지 않게 되고 곧 사라졌다.
로우 위는 할 말을 잃고 발렌타인이 사라진 자리를 지켜봤다. 지직지직하고 세계에 노이즈가 생겨난다.
하늘에도, 땅에도. 로우 위를 제외한 모든 것에 노이즈가 일어난다.
슈톨렌이 떨리는 손으로 로우 위의 어깨를 감쌌다. 그 몸 조차 심한 노이즈로 뒤덮여 사라져가고 있었다.
"로우 위님!"
울먹이는 목소리로 하지만 강한 결의를 담은 눈으로 슈톨렌이 로우 위를 봤다.
넋이 나간듯 탈력한 로우 위의 모습에는 이제까지의 품위와 카리스마가 없었다. 마치 평범한 한 사람의 인간으로 보였다.
"제가 곁에 있을게요. 제가.. "
점점 노이즈가 슈톨렌의 목을 타고 올라와 얼굴을 침식한다. 슈톨렌은 자신의 존재가 흐려져감을 느꼈다.
그래도 강한 의지를 담아 같은 말을 계속 반복한다. 혼자 두지 않을거에요. 곁에 있을게요. 모든게 사라져버린다 하더라도.
슈톨렌은 팔에 힘을 더해 끌어안았다. 로우 위가 뒤에서 둘러진 팔에 천천히 손을 댔다.
온기와 떨림. 신뢰와 불안. 애정과 두려움. 모든게 담긴 접촉이었다. 그러고 보면 자신이 먼저 손을 뻗은 적이 있었던가.
로우 위는 그 손을 꽉 붙잡았다. 그러려고 했다.
손이 주먹을 쥔다. 그 안에 붙잡고자 했던 온기는 없었다. 등 뒤를 감싸던 온기가 사라졌다는 걸 깨닿는다.
로우 위는 몸을 돌려 주위를 둘러봤다. 주위엔 아무도 없었다.
노이즈가 점점 하늘을 뒤덮고 결국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깊은 어둠만이 남았다.
로우 위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울부짖었다.
그들은 정말로 사라져버린 것일까.
바움쿠헨은 학교로 걸어가며 생각했다.
협회에 연락해서 들은 것을 토대로 생각해보면 하이의 편에 서서 로우 위에게 저항했던 자신들 외의 회원들은
로우 위라는 인간이 존재했다는 사실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의 기억에서 로우 위는 완벽하게 배제된 것이다.
그렇다면 그 기억 수정의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바움쿠헨 자신은 로우 위를 기억한다. 한때 로우 위를 지지하던 아마렐로와 티피카도 로우 위를 기억한다.
바오산과 쓰마오는 로우 위를 기억하지 못했다. 전화로 확인한 결과 그들은 한국에 발을 디딘 기억조차 없다고 답변했다.
그들에게 슈톨렌에 대해서도 물어볼까 하다가 그만 뒀다. 사실 슈톨렌은 그리 인지도가 높은 회원이 아니라 자신과 로우 위 정도 외엔 그의 이름조차 모를 터였다.
로우 위의 곁에서 미래를 볼수 있게 되기 전까지는 발렌타인도 그의 이름을 가물가물하게 떠올릴 정도다. 마땅히 물어볼 대상이 없었다.
그건 슈톨렌이 남긴 흔적이 흐렸다는 반증이라 조금 서글픈 기분이 들었다.
사거리에 서서 신호를 기다렸다. 등교시간을 약간 앞선 시간이라 학교 앞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학생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승용차들과 버스가 눈 앞을 지나고 곧 신호등에 초록 불이 들어왔다. 바움쿠헨은 성큼성큼 걸어 길을 건넜다.
문득. 정면에서 걸어오는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흔하지 않은 색의 머리카락이 너무나도 눈에 익어서 무심코 스쳐지나가는 사람의 팔을 붙잡아버렸다.
이건. 있을수 없는 일이다.
착각이라고 생각하고 바로 손을 떼고 사과하려던 입가가 굳었다.
동공이 풀린 멍한 얼굴. 하지만 눈꼬리가 올라가 날카로운 인상의 얼굴. 반쯤 감고 있지만 똑바로 뜨면 큰 눈.
작은 키와 어려보이는 얼굴 탓에 어리게 취급 받을때마다 입술을 꾹 깨물었다가 다시 벌어져 독설을 내뱉는 입.
그런 특징적인 얼굴을 가진 인간이 세상에 여럿일리가 없다.
붙잡힌 팔을 내려다보던 멍한 눈동자에 빛이 들어왔다. 눈을 깜빡이고 고개를 들어 팔을 잡은 사람의 얼굴을 직시한다.
"바.....움..쿠헨?"
확실하게 본인이다.
"그래서 어디까지 기억하고 있다고?"
발렌타인이 의자에 기대어 앉아 머리를 감싸고 있는 슈톨렌을 보며 옆에 선 바움쿠헨에게 물었다.
"한국에 와서부터의 기억이 거의 대부분 없다는 군."
왜 여기에 있는지. 여지껏 무얼 하고 있었는지. 슈톨렌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한다.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로우 위와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 한 슈톨렌에게서 그 기억을 들어내버리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눈을 떴을 때는 처음 보는 골목안에서 잠들어있어서 그대로 발이 이끄는 대로 걸어서 그 사거리 까지 왔다고 한다.
발렌타인은 멍한 표정으로 창 밖을 내다보고 있는 슈톨렌의 옆얼굴을 바라봤다.
로우 위와 있을 때의 생기있는 표정은 사라지고 지금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식의 넋이 나간 표정만이 그 얼굴위에 드리워져 있었다.
"그래서"
한참의 침묵 뒤에 발렌타인이 입을 열었다.
"?. 그래서라니."
바움쿠헨이 의미를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되물어온다.
"어떻게 할거야?"
"어떻게라니... 죽이기라도 하자는 말인가?"
"그런 말은 한적 없어. 하지만."
발렌타인이 곁눈질 했다. 그 시선 끝의 슈톨렌은 자신의 이마에 손바닥을 대고 기억을 헤집어보고 있었다.
군데군데 비어있는 기억들 중 무언가를 떠올리려 할 때마다 머리가 아픈지 찌푸린 미간을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며 눈을 깜빡였다.
"그의 존재가 위험 요소임에는 틀림없지."
슈톨렌은 로우 위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로우 위의 사상에 가장 심취해있던 회원이다.
그런 그가 로우 위를 기억해내게 된다면 그는 분명 무언가 행동에 나설것이다. 그게 이쪽에 있어서는 좋은 일이 아닐거라는 것쯤 쉽게 상상할 수 있다.
바움쿠헨이 노골적으로 표정을 찌푸렸다. 물론 그렇다, 며 수긍하면서도 납득하지 않은 얼굴이었다.
발렌타인은 슈톨렌의 곁으로 다가갔다. 이전 로우 위에게 다가가려 했을 때의 경계하던 표정은 흔적도 없이 평이한 얼굴로 바움쿠헨을 한번 흘끗 바라보고 발렌타인의 얼굴을 올려다본다.
"당신은 누구지?"
"그렇군. 대면은 처음...이던가?"
발렌타인이 뒷머리를 긁적이고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C.발렌타인. 커피협회 소속의 평범한 회원이지"
찡긋 윙크해보이며 붙임성 있게 말을 걸어본다.
슈톨렌이 C.발... 어디서 들어본 이름인데.. 라며 잠시 고민하다가 놀란듯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
"협회 최강이라는 C.발렌타인?!"
"알아주니 영광이군."
"그런 회원이 왜 이런곳... 여긴.. 평범한 학교가 아닌가?"
왜 이런 곳에 있냐고 물으려다 말을 바꾼다. 자기가 기억하고 있지 않을 뿐 사실은 여기가 중요한 협회 시설중 하나일지도 모른다는 가설을 떠올린 모양이었다.
"아니, 평범한 학교야."
"그럼?"
"우리들의 신이 있다는 것만 빼면. 말이야."
바움쿠헨이 섣불리 말해도 되냐며 뒤에서 참견했다. 발렌타인은 입을 다물고 잠깐 있어보라는 제스쳐를 취했다.
슈톨렌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커피신이 여기에?"
슈톨렌은 입가에 손을 대고 잠시 생각했다.
"그러고보니 이번 커피신은 고등학생 정도의 나이던가... 오늘은 며칠이지? 커피신은 이미 각성한 건가?"
"그래. 그는 이미 신의 힘을 얻었어."
"그럼 저녀석이나 당신이 여기 있는 이유도 알것 같군."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나도. 커피신을 보호하러 여기에 온건가?"
의아한 표정이다. 슈톨렌이 발렌타인과 마주하고 있던 시선을 무릎 위에 둔 손으로 돌린다.
두 손을 펴고 그 아무것도 없는 손바닥 안을 뚫어져라 바라본다.
"뭔갈.. 지켜야 한다는... 그런 느낌은 남아있어."
공백의 기억. 그 안에 어렴풋하게 남은 강한 의지. 신을 지켜야 한다는 회원의 본능인가 싶었지만 그것과는 살짝 다른 기분이 들었다.
소중한.. 소중한 무언가. 지끈하고 머리가 아파온다.
"중요한... 지켜야 할..."
머리가 지끈거렸다. 두개골이 쪼개지는 듯한 고통과 함께 눈 앞을 흰 빛이 번쩍거렸다.
흰 그림자가 어렴풋이 흔들린다. 무너져내리는 세계. 모든게 부숴져내리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세계.
"큭"
슈톨렌이 앉아있던 의자에서 쓰러질듯 기울어진다. 몸이 기우는 것조차 느끼지 못 할만큼 머리의 아픔에 온 신경이 집중되어있었다.
바움쿠헨이 쓰러질듯한 슈톨렌의 어깨를 잡아 원래의 위치로 돌려놓았다.
"우선은 쉬는게 좋겠군."
"좋을대로"
발렌타인이 어깨를 으쓱해보인다.
바움쿠헨은 머리를 감싼 슈톨렌을 일으켜세워 교실을 나섰다. 발렌타인은 가만히 서서 그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
바움쿠헨의 집은 쥬브나일 고등학교에서 10분거리에 있는 원룸이다.
바움쿠헨과 슈톨렌은 골목을 돌아 들어와 비슷비슷한 외관의 건물들이 늘어선 길로 들어섰다.
바움쿠헨은 조금 더 걷다가 플레이트에 00빌라 0동 이라고 적힌 건물 앞에서 멈춰서서 반정도 열린 유리문을 열고 바움쿠헨이 계단을 올라갔다.
그 뒤를 부축은 필요 없다며 바움쿠헨의 도움을 거절한 슈톨렌이 아직 조금 지끈 거리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따라 걸었다.
앞서 가던 바움쿠헨이 복도 맨 끝쪽의 방 앞에 서서 주머니를 뒤적거리곤 열쇠를 꺼낸다. 슈톨렌이 문 앞에 다다랐을때 쯤엔 문은 완전히 열려 있었고,
문을 잡고 선 바움쿠헨의 유도에 따라 슈톨렌은 방 안으로 들어섰다.
방안은 조금 난잡했고 의외로 생활감이 묻어나왔다.
침대 위에는 아침에 갈아입은 듯한 옷의 잔해가 적당히 쌓여있었고 싱크대에는 기름기가 묻은 후라이팬과 커피가 말라붙은 컵이 방치되어 있었다.
옷장 위에 차곡차곡 쌓인 같은 색의 비니모자. 책장에 꽂혀있는 적은 양의 책. 구석에 놓인 덤벨. tv위에 놓인 작은 액자.
슈톨렌은 문득 어린 시절 들른적이 있는 바움쿠헨의 방이 떠올라 잠시 감상에 젖었다. 그때는 덤벨같은건 없었지만..
먼저 방안으로 들어간 바움쿠헨이 침대 위의 옷을 집어들고 의자에 척척 걸쳤다.
바닥에 떨어져있는 운동 잡지같은걸 주워 책장에 꽂아두고 슈톨렌에게 침대에 앉을 것을 권했다. 그러고는 책상 의자를 돌려 자리에 앉았다.
뻘쭘하게 서있기도 뭐해서 슈톨렌은 방 안으로 들어가 침대 구석에 앉았다. 몇년은 이 방에 있었을 침대는 조금 낡아서 슈톨렌이 걸터앉자 끼익하고 작게 비명을 질렀다.
한참을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색한 시간만이 흘러간다.
원래도 바움쿠헨은 그리 말이 많은 타입은 아니라 두 사람이 파트너로 움직일때는 대부분의 말은 슈톨렌이 했었다.
그런 슈톨렌이 입을 다물자 자연스레 아무 말도 오가지 않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사실 말을 먼저 꺼내보려 해도 바움쿠헨이 알고있는 기억과 슈톨렌의 기억의 차이를 알수 없었기에 선뜻 말을 꺼낼수 없었던것도 바움쿠헨이 입을 다문 이유중의 하나였다.
자칫 말실수를 해서 슈톨렌이 로우 위에 대한 것을 떠올린다면... 발렌타인의 말이 떠올랐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다지 바람직한 결과로 이어지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바움쿠헨은 침묵했다.
"... 커피"
슈톨렌이 먼저 말을 꺼냈다. 순간 나온 말에 바움쿠헨은 잠시 반응을 못하고 슈톨렌을 바라봤다.
"커피 달라고."
슈톨렌이 침대 구석에 앉아있던 몸을 쭉 펴고 몸을 뒤로 젖혔다.
긴장을 푼 편한 자세로 손님이 왔는데 커피정도는 줄수 있는거 아니냐고 불평을 늘어놓는 모습을 보면서 바움쿠헨은 커피포트에 물을 담았다.
물이 끓는 걸 기다리는 동안 등 너머의 슈톨렌의 기척에 주의를 기울이는걸 소홀히 하지 않았다.
슈톨렌은 어느새 침대 위에 누워서 뒹굴거리다가 지겨운듯 몸을 일으켜 안그래도 좁은 방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살펴봤다.
책상 위에 있는 노호혼-발렌타인이 오락실에서 뽑고선 필요없다고 떠넘김, 이때 리베리카는 인형을 열 몇개 받았다-이 고개를 좌우로 까딱거리는 걸 멍하니 보다가
책장을 뒤적거리다 의자에 앉아 빙글빙글 돌다가. 바움쿠헨이 커피를 타서 가지고 오자 돌리던 의자를 발로 멈추고 양 손으로 받아 잠깐 입을 대고는 뜨겁다고 뻘게진 혀를 빼죽
내밀곤 컵을 책상 위에 올려놨다.
"넌 아는거 아냐?"
손에 든 머그컵을 흔들어 컵속에 작은 소용돌이를 만들며 슈톨렌이 말을 꺼냈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시간동안 내가 뭘했는지."
"...아니"
순간적으로 튀어나온건 거짓말이었다.
"미안하지만 나도 잘 모르겠군. 너랑은 여기 오고 난 후로 거의 만나지 못했으니까."
오래 만나지 못했다는것 자체는 사실이었다.
실지로 바움쿠헨이 리하이를 따르고자 맹세한 순간부터 두사람의 접점은 완전히 끊어진거나 다름 없었다.
다시 만났을때는 이미 위험요소가 되어 처리해야 될 대상이 되어 있었던가.
슈톨렌의. 정확히는 슈톨렌이 가진 능력에 대한 위험성과 그를 처리하기 위한 방법을 논의하기 위해 몇번이고 몇번이고 대책회의를 했다.
걱정과 달관과 불안이 담긴 시선들이 교차하고 흉흉한 말들이 오갔다. 기습, 폭격.. 결과적으로 슈톨렌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다양한 방법들을 갈구했다.
기억속의 슈톨렌의 모습과 그 이야기들 속의 처리 대상으로서의 슈톨렌의 갭이 혼란스러웠다. 그런... 존재였던가. 그런 사람이었던가. 바움쿠헨은 몇 번이나 고민했다.
그리고 처음이자 마지막 재회의 순간. 피투성이로 쓰러진 바움쿠헨에게 곁눈질 한번 없이 로우 위의 뒤를 따르는 뒷모습을 기억해낸다.
그제서야 자기가 알던 때의 슈톨렌은 없다고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겨우 내려진 결론과 각오를 품고 움켜쥔 주먹은 그 등을 향해 내질러지는 일 없이.
슈톨렌의 존재는 소멸했다. 그렇다고 생각했다.
눈 앞의 슈톨렌을 본다. 뜨거운 커피를 식히며 홀짝거리다가 바움쿠헨과 눈이 마주하자 장난스레 웃었다.
그 친근한 모습에서는 전의 위험함은 없었다. 마치 로우 위와 만나기 전으로 돌아간 듯한.. 그런 기분까지 들었기에 바움쿠헨은 지금의 슈톨렌은 위험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뭐야. 좀더 푹신한 베개는 없어?"
바움쿠헨이 장롱에서 꺼내온 묵은 내 나는 베개를 두어번 꾹꾹 눌러본 슈톨렌이 불평했다.
딱히 갈곳이 없는 상태인 슈톨렌은 바움쿠헨의 집에서 잠시 지내겠다고 말했다.
바움쿠헨도 딱히 불만은 없었기에 두말없이 장롱에 넣어둔 안쓴지 한참된 요와 이불을 꺼내 바닥에 깔았다.
침대를 쓰겠다고 할거라 생각했던 바움쿠헨이 바닥에서 잘 준비를 하는 슈톨렌을 의외라는 듯 바라보자 '나도 염치란건 있지' 라고 말하곤 털썩 소리가 나게 눕고는 팔다리를 쭉 폈다.
바움쿠헨이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쓴 슈톨렌을 보고 불을 끄고 자리에 누웠다.
이내 부스럭부스럭하는 소리가 나더니 슈톨렌이 이불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바움쿠헨은 할 말이 있는 듯 슈톨렌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바로 누웠다.
잠시 후 두사람의 숨소리만이 방을 가득 메웠다.
새벽에 문득 눈이 떠졌다.
불투명한 창문을 통해 희푸른 새벽 하늘이 엿보였다. 서늘해진 공기에 잠옷 밖으로 드러난 팔을 문지르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바움쿠헨은 평소처럼 무심코 발을 내딛으려다 멈췄다. 바닥에 깐 이불 위에 정자세로 잠이 든 슈톨렌이 조용히 숨을 내쉬고 있다.
깍지를 끼고 모은 두 손이 배 위에서 오르락 내리락하는 모습을 본다. 한때는 거의 매일 아침이면 보던 광경이었지만 지금은 어딘가 멀고 낯설게 느껴졌다.
여기에 슈톨렌이 있다는, 그것 자체가 사실 현실성 없이 느껴지기도 한다.
바움쿠헨이 하이를 따르기로 정한 그 순간부터 슈톨렌과 바움쿠헨은 영원히 접할 일 없는 평행선 위에 놓여진 거나 다름 없었기 때문이다.
그 각오도 마음도 모두 비틀리고 기억의 대부분이 구멍투성이가 된 지금의 슈톨렌은 기억속의 슈톨렌과 같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걸까.
바움쿠헨은 생각했다.
로우 위와 자신이 처음 만난것은 8년전. 아마 슈톨렌도 비슷한 시기에 로우 위라는 존재를 알게 되었을 것이다. 가끔씩 두 사람이 만남을 가진다는 것을 바움쿠헨도 알고 있었다.
한달, 혹은 두달. 그리 잦은 횟수는 아니었지만 슈톨렌이 어딘가 들뜬 표정으로 잠시 나갔다 온다고 하는 걸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번은 슈톨렌을 따라 나선적이 있었다.
슈톨렌은 잠깐 미간을 찌푸렸다가 어쩔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며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슈톨렌은 밖으로 나서기전 바움쿠헨의 비니를 똑바로 고쳐씌워주고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잡고 협회 건물을 나와 버스를 타고 번화가로 향했다.
가는 중 어디로 가냐고 묻자 슈톨렌은 '카페'라고 짧게 대답한 후 누굴 만나러 간다는 식으로 덧붙였다.
버스에서 내려 조금 걸었다. 슈톨렌은 주위를 두리번 거리다가 작은 카페의 테라스에서 커피를 마시는 로우 위의 모습을 발견했다.
슈톨렌이 바움쿠헨의 손을 놓고 빠른 보폭으로 로우 위를 향해 걸어갔다.
바움쿠헨은 그 뒤를 반쯤 달리듯 쫓아갔다.
로우 위의 맞은편 자리에 앉아 슈톨렌은 카푸치노를, 바움쿠헨은 파르페를 주문했다. 단정한 복장의 점원이 쟁반에 담긴 주문품을 내려놓고 갔다.
바움쿠헨은 끝부분에 꽃이 세겨진 작은 스푼으로 제일 윗쪽에 쌓인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찔렀다. 바움쿠헨이 손을 움직일 때마다 흰 아이스크림에 시럽이 뒤섞여 미묘한 색으로 변해간다.
입으로 가져갈 생각은 하지 못하고 바움쿠헨은 옆자리에 앉은 슈톨렌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생기넘치는 얼굴로 대화하는 슈톨렌은 매우 즐거워보였다.
뭐가 그리 즐거울까 싶어 둘의 대화에 귀 기울여 봤지만 전혀 이해가지 않는 말들 뿐이었다.
일에 관련된 대화인 듯 신이니 능력이니 하는 단어 몇 개가 귀에 들어왔다. 혹여나 자기가 아는 범위의 내용이 나올까 싶어 바움쿠헨은 몸을 긴장시키고 끼어들 타이밍을 쟀다.
하지만 대화의 흐름은 결국 이해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갈 뿐이었다.
"재미없어"
바움쿠헨은 바닥에 닿지 않는 다리를 까딱거리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 중얼거림은 누구에게도 닿지 않고 결국 한참 시간이 흘러 바움쿠헨의 파르페가 다 녹아 물이 되었을 쯤, 슈톨렌이 기껏 산걸 왜 안먹냐고 핀찬을 줄 때까지
지루한 시간은 계속 되었다.
그 뒤로는 바움쿠헨이 슈톨렌을 따라나서는 일은 없었다.
어차피 자기가 있어봤자 재미도 없고 왠지 슈톨렌이 다른 사람처럼 느껴지는 것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의 경계심과 선을 긋는 듯한, 생존하기 위해 몸에 벤 발버둥같은 것들. 그런게 로우 위와 함께 있을 때의 슈톨렌에게선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항상 내뱉는 가시박힌 말도 퉁명스러운 말투도 그의 앞에서는 나타나지 않았다. 깍듯한 존댓말에 정중한 태도, 존경을 담은 눈동자.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깊게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슈톨렌의 태도는 어린아이가 부모를 따르는것 만큼이나 맹목적이었다.
그런 것들은 마음을 놓은 상대에 대한 방어 의식의 부재라기 보다는 약에 취해 인사불성이 된 사람의 무방비함에 가까운 것처럼 느껴졌다. 기분 탓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바움쿠헨에게 그런 슈톨렌의 모습은 낯설게 느껴졌고 위화감을 느끼고 거리를 두게 된 순간부터 두 사람의 사이는 조금씩 멀어지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부터 로우 위는 슈톨렌을 계획에 포함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시간에 관한 능력이란건 꽤나 번거롭고 까다로웠다.
능력이 발동하는 조건부터 자기 능력의 한계, 실전에서 활용할수 있는 능력인가에서 부터 분할 되었을 때의 조건이나 아무튼 생각할 거리가 많았다.
그렇기에 지금 세대의 회원 중에선 시간에 관한 능력을 가진 건 슈톨렌이 유일했다.
슈톨렌은 그 번거로움을 마음에 들어했다. 활용 가능한 상황을 시뮬레이팅해보고 다른 회원들에게 실험해보며 자기 자신의 인식 범위와 가능성을 확인해갔다.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솔직히 말해 바움쿠헨도 그렇게 생각했다. 적에게 등을 보일 녹록한 회원은 웬만하면 없었다.
그런 능력을 쓰느니 차라리 회원으로서의 신체 능력을 활용해 공격하는 편이 몇배는 효율적이다. 그래서 슈톨렌의 그런 노력을 지기 싫어하는 성격에서 나오는 오기라고 여겼다.
무의식중에 드러난 그런 바움쿠헨의 태도를 슈톨렌은 아주 질색했다. 네 능력은 얼마나 효율적이길래 그러냐며 화를 내곤 했다.
아무튼 그렇게 흔한 능력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후의 로우 위의 행보를 보면 마치 슈톨렌의 능력이 그리 변화할줄 알았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확실하지 않더라도 자신이 그렇게 만들거라는 생각을 품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그렇게 오랜 시간을 들여 조금씩 조금씩 잠식해간 것일테다.
문을 열고 들어오던 하이가 놀라서 뒷걸음질쳤다.
바로 뒤에서 들어오려던 리베리카가 그 뒷통수에 코를 부딫힌듯 얼굴을 감싸고 교실 안을 들여다봤다.
의자에 삐딱하게 앉아있던 슈톨렌이 바움쿠헨이 예를 차리는 걸 곁눈질로 확인하고 자세를 바로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가 커피신-"
"당신이 어떻게 여기 있죠?!"
리베리카가 경계하며 세된 소리를 냈다. 하이의 앞을 막아서며 명백한 적의를 드러내는 리베리카를 보며 슈톨렌은 적잖히 당황했다.
"초면의 상대에게 그런 취급을 받을 짓을 한 기억은 없는데"
슈톨렌도 불쾌하다는 듯 표정을 찌푸리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리베리카가 코웃음 쳤다.
"기억이 없다니? 당신이 이제껏 한 짓들을 기억하지 못하기라도 한단 말입니까?!"
기억이 안난다니. 한번 죽기까지 했던 리베리카의 입장에서 듣기에는 너무나도 어처구니 없고 화가 나는 발언이었다.
리베리카가 주먹을 그러쥔채 슈톨렌을 향해 한 걸음 내딛었다. 슈톨렌도 맞받아칠 자세를 취했다.
"이런, 이게 무슨 상황이야."
일촉즉발의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느긋한 목소리가 들렸다.
하이의 뒤를 따라 들어선 발렌타인이 리베리카의 어깨를 붙잡았다. 조금 누그러진 긴장감에 바움쿠헨이 한숨을 내쉬고 발렌타인에게 설명을 요구했다.
"어제 일러둔다는걸 깜빡했어"
그렇게 말하고 발렌타인이 싱글싱글 웃었다.
"발렌타인! 어째서 저 사람이 여기 있는거죠? 그는 로ㅇ-"
로우 위와 함께 소멸한 것이 아닌가. 그렇게 말하려는 리베리카의 입을 발렌타인이 틀어막았다.
"진정해. 진정해. 우선은 잠깐 나가서 이야기라도 나누지 않을래? 응?"
두 사람이 교실 밖으로 사라지고, 하이가 슈톨렌을 흘끗 보고는 피하듯이 그들을 따라나갔다.
영문을 모르는 슈톨렌은 바움쿠헨을 돌아보고 설명을 요구하려 했지만 바움쿠헨은 필사적으로 다른 곳을 보며 슈톨렌의 눈을 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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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가요"
발렌타인에게서 대략적인 설명을 들은 리베리카가 그래도 아직 납득이 가지 않은 얼굴로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로우 위가 사라지는 것으로 인해 리베리카는 살아있다. 그것은 슈톨렌이 로우 위와 함께 저지른 죄도 함께 사라졌다는 뜻이 된다.
기억을 하는 자신은 납득이 가지 않지만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들은 '일어나지 않았던' 일이다.
꿈에서 누군가에게 해를 입었다고 해도 그걸 진심으로 화내는 사람은 없다. 어찌보면 그것과 별반 다를 것 없는 일이다.
그래도 리베리카는 슈톨렌을 완전히 용서할 수가 없었다. 하이를 지키기 위해 누구 보다 노력해왔던 그녀의 입장에선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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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베리카와 발렌타인, 그 뒤를 따라나갔던 하이가 함께 교실로 돌아올때까지 바움쿠헨과 슈톨렌은 그 교실에서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다.
적의는 덜해졌지만 찝찝하게 다가오는 리베리카의 시선에 슈톨렌은 짜증이 날듯말듯하는걸 참았다.
곧 로부스타와 홀스타인, 마스카포네가 교실로 들어왔다.
리베리카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은 적대심을 표하는 걸 바움쿠헨이 억지로 진정시키며 게임 삼매경인 발렌타인에게 눈총을 보냈다.
겨우 대화를 할수 있는 상황이 되자 회원들은 슈톨렌을 둘러쌌다.
"재판대 앞의 죄수꼴이군."
슈톨렌이 의자에 다시 앉으며 빈정거렸다.
내려다보는 시선들을 대충 흘러넘기며 여유를 가장했지만 사실 내심 불안했다.
S급 능력자에 간부인 로부스타와 협회 최강이라고 여겨지는 발렌타인, 로부스타의 일족 중에서도 강하기로 소문난 리베리카. 게다가 우유협회의 협력자라고 여겨지는 처음보는 회원 둘.
그들의 태도가 호의적이지 않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나마 슈톨렌을 옹호하는 쪽에 속하는 바움쿠헨도 전체 의견에 따라 어떻게 튈지 모른다.
슈톨렌은 자기에 대한 처분으로 논쟁하는 회원들을 보면서 머리 속으로 이 자리를 어떻게든 벗어날 방법에 대해 생각했다. 탈출 경로를 머리속으로 그려본다.
일단은 제일 큰 위험 요소인 발렌타인의 등을 밀어 미래로 보내고 입구 쪽에 가까운 커피신을 보면서 인질로 잡을까.. 하는 회원으로는 조금 불경한 생각을 한다.
상황이 안좋게 굴러가면 전투가 벌어질지도 모른다. 1대 1로는 바움쿠헨 한 사람도 조금 버거울 정도다. 무사히 나갈수나 있을까.
이런 저런 상황을 시뮬레이션 해보다가 문득 생각을 멈췄다.
여기서 벗어나 어디로 가야하나. 떠오르는 장소가 없었다. 독일로 돌아갈까.
아니 애초에 커피신에게 저렇게 적대감을 줄정도의 행동을 기억을 잃기전의 자신이 했다는 말인가. 그건 자신이 회원으로서 존재한다는 정체성 그 자체에 타격을 주는 심각한 상황이었다.
어째서 자신은...
기억해내려 노력해봤지만 떠오르는 건 없었다.
각 회원들과 접하면서 조금씩 섞여들어가는 슈톨렌, 하지만 기억 어딘가에 위화감이 남음.
목에 걸린 가시처럼 걸리적거리는 빠진 기억들을 떠올려보려고 하지만 생각나지 않은 채로 계속 일상을 보냄.
바움쿠헨과 과거 이야기 대화->발렌타인이 기억나는게 없는지 가끔 물어보곤함->적대적인 분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로 불편하게 지내게 됨. (액면가 덕에 교복 입고 학생으로 지냄)-> 회의라고 정기적으로 모이지만 적대적이라 불편하기만 해서 혼자 밖으로 나돔. 그러다가 걷은 노트를 들고 교무실로 가다가 계단에서 구를뻔한 선지를 도와주게 됨(우유협회측에서 숨겨서 여신인줄 모름)->->
소실된 기억과 슈톨렌에 대한 태도
바움쿠헨은 현 상태 유지파. 슈톨렌의 기억이 돌아오지 않기를 원함. 현 상태에서 가장 슈톨렌에게 우호적. 무슨 일이 있으면 슈톨렌을 옹호하지만 우선순위가 하이보다 높진 않음.
발렌타인은 기억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 거라는 걸 예감하면서도 기억하기를 원하는 모순된 감정을 가짐. 중립. 기억을 찾는데 조력자 역할. 굳이 치면 로우 위에게 우호적. 좋은 쪽의 기억을 공유할 사람을 원하는 듯하다.
리베리카는 이해는 했지만 납득은 못한 상태. 근처에 있으면 무의식적으로 경계함. 후에 선지를 도와주고 하이에게도 제대로 신을 대하는 태도를 보이기에 조금 마음이 풀리긴 함. 그래도 비꼬는 말투라던가 공격적인 태도같은거 때문에 성격적으로 안맞는듯.
홀스타인과 마스카포네는 적대함. 선지를 한번은 죽였었고 우유협회를 괴멸상태로 몰아간 장본인이기 때문에 없던 일이 되어도 앙금 수준이 아닌 분노가 남음. 선지의 정체를 일부러 숨기고 슈톨렌에게 가르쳐주지 않지만 우연히 만나고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는 선지를 보며 마음이 복잡해짐
로부스타는 신의 힘에 대해 신실하기 때문에 슈톨렌이 기억을 잃고 나타나거나 선지와 만나 호의적인 관계를 맺은 걸 보고 우주의 법칙이 그렇게 한거라고 생각하고 납득하고 있음. 그렇기에 처음에는 경계했지만 반드시 괜찮을 거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후에는 태도를 누그러트림.
하이는 직접적으로 목숨의 위협을 받은 적은 있었지만 그게 바움쿠헨 보다는 덜 위협적이었기 때문인지 그렇게 무섭지는 않음. 선지를 죽였던 것 때문에 경계했지만 당사자인 선지가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자 좋은게 좋은거라는 태도로 중립.
빠진 기억 찾기
발렌타인이 조금씩 흘려주는 단서, 꿈 속에서 나타난 넋이 나간듯 선 뒷모습, 사람들과의 이야기에서 공통적으로 떠오르는 공백
기억의 뚜껑이 열릴락 말락 할때 같이 걸었던 거리를 지나다가 로우 위가 불렀던 노래가 나오고 완전히 떠올림. 그러자 세계가 이상하게 일그러진 것 처럼 느껴지기 시작함. 상냥한 두 사람의 신이 엮어내는 상냥한 세계. 분명 그건 행복하고 평화로운 세계일 것이다. 하지만 한 조각이 빠진 것 만으로 슈톨렌에게는 그 세계는 고통으로만 다가왔다. 아까까지 평범하게 살아가던 지극히 당연한 세계였을텐데. 마지막으로 끌어안았던 팔 안의 온기를 떠올린다. 처음으로 듣는 흐느낌과 금방이라도 부숴져버릴 것처럼 연약하게 떨리던 어깨와. 함께 하기로 했던 거짓말. 슈톨렌은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학교 옥상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한때 지진이 일어나 아수라장이 되었던 건물들과 거리를 생각함. 그 사이를 유유히 걷던 남자와 그 뒤를 따라 걷던 자기 자신의 모습. 소리도 없이 다가온 발렌타인이 어느새 옆에서 아래를 내려다봄. 운동장에는 체육 수업을 받는 학생들이 축구를 하고 있었음. 슈톨렌은 발렌타인에게 주어 없이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함. 발렌타인도 주어 없이 아는 사람의 이야기를 하듯 둘은 한참동안이나 대화를 나눔.
00. 꿈 속의 괴물
그리고 그날 저녁, 하교길 근처 공원의 가로등 아래서 하이와 선지의 하교를 기다리고 있던 슈톨렌은 꽉 잡고 있던 둘의 손을 끊어내고 하이의 등을 밀어 미래로 보냄. 그리고 혼자 남은 선지를 인질로 잡음. 슈톨렌이 어둠을 향에 나오라고 말하자 어둠속에 숨어있던 다른 회원들이 가로등 근처로 다가옴.
배신할 줄 알았다는 목소리와 기억이 돌아와 버린거냐는 당혹스러워하는 목소리가 섞여들림. 슈톨렌은 선지를 놓으라며 다가오는 회원들을 향해 고개를 들어 천천히 그들의 눈을 봄. 분노에 찬 홀스타인, 경악하는 리베리카. 왜 그런 선택을 하냐고 탓하는 듯한 바움쿠헨, 무덤덤한 발렌타인.
갑작스런 상황에 떨고있는 선지의 귓가에 슈톨렌이 속삭임. 나는 네 꿈속의 괴물이야. 나를 꿈속으로 돌려보내줘. 그 사람 곁으로. 떨림이 멎은 선지가 뒤를 돌아보려고 하는 걸 제지하고 슈톨렌은 앞에서 다가오는 바움쿠헨을 봤다. 그래 숨을 끊어준다면 네가 좋겠어. 눈이 마주치자 바움쿠헨은 움찔하고 발을 멈췄다. 한동안 눈을 마주했다. 함께한 시간에 비하면 짧고 찰나에 지나지 않을 순간. 슈톨렌은 슬쩍 입꼬리를 올려 깨달을 듯 말듯한 미소짓고 선지의 등을 떠밀었다. 선지의 모습이 사라지자 바움쿠헨이 달려들었다. 거기에 맞서듯 공격하는 자세를 취하던 슈톨렌은 맞부딛히기 직전에 전신에서 힘을 뺐다. 방어도 뭣도 하지 않은 몸은 그대로 바움쿠헨의 주먹에 맞고 날아가 공원의 자판기에 부딛히고 무너져내렸다. 갈비뼈가 부러져 폐를 찔렀다. 쿨럭하고 기침을 하자 핏덩이가 목을 타고 넘어와 입 밖으로 터져나왔다. . 치명상은 아니었기에 이대로 기다리면 회원의 회복력으로 멀쩡해 질 것이다. 하지만 그래선 의미가 없어.
우그러든 자판기를 보며 언젠가의 데자뷰를 느낀다. 그때도 너는 어정쩡하게 힘조절을 해서는 이쪽을 비참하게 만들었었지. 스스로 믿기로 정한 신이니까 방해물을 처치할 각오정도는 하란 말이야. 아직 어린 동생같던, 덩치만은 누구에게 뒤지지 않는 소년을 본다. 그 너머로 근처까지 다가온 회원들 보다 몇걸음이나 더 뒤에 선 발렌타인이 이쪽을 보고있다. 방관자이기에 부탁할 수 있었던 역할을 눈으로 재촉한다. 발렌타인이 품에 손을 넣어 반짝이는 것을 꺼냈다.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까지 다가온 바움쿠헨을 한번 본다. 그리고 이번에는 확실히 알수 있도록 확실하게 미소지었다. 안녕. 나는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갈거야. 겨눠진 총구가 어둠속에서 빛났다. 마른 파열음과 함께 기억 고장난 가로등처럼 점멸하다 끊어졌다.
에필로그
남자는 헤메고 있었다.
아무도 남지 않은 골목길에서 걸어나와 아무도 없는 곳을 그저 헤메일 뿐.
자기 이외의 목소리를 들은 게 언제였더라. 타인의 모습을 본게 언제였더라. 등뒤에 남아있던 온기가 사라져 버린건 언제였더라
신도 하나 남지 않은 무력한 신은 그저 타인을 원하며 헤메었다.
잠을 자지도 않고 무언가를 먹지도 않은채로 계속 걸었다. 먼지와 시간은 남자를 피해 흘렀고 더러워지지도 여위지도 않는 남자는 홀로 세계 안에 박제된 듯 보였다. 걷고 걷고 또 걷기만 하던 남자의 귀에 어느날 소리가 들렸다. 실제로 들린 소리는 아닐지도 몰랐다. 정말로 난 소리일지도 몰랐고. 그걸 판단할 타인은 여기에는 없었다. 남자는 소리를 따라 걸었다. 정처없이 걷던 길에 그나마의 목표가 생긴 것이다. 남자는 걸었다.
소리는 어떤 때는 크게, 또 어떤때는 작게, 들렸다가, 들리지 않았다가를 반복했다. 무언가를 부르는 소리 같기도 누군가의 울음소리같기도 하고 그냥 의미 없는 기계음 같기도 한. 그게 무엇이든 상관은 없었다. 어차피 이것보다 최악인 상황이란건 존재하지 않았음으로.
한참을 걷고 걸은 끝에 다다른 소리의 근원지는 처음 남자가 혼자가 되었던 골목길이었다.
해가 지기 시작해 어스름이 내려앉은 골목길 안에, 떠나기 전에는 없었던 덩어리같은게 거기에 있었다. 마치 인간의 형상 같은...
남자는 무슨 말이라도 꺼내려는 듯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그리고 골목길 안쪽으로 발을 딛었다. 가까이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그 형상의 모습이 선명해졌다. 차가운 아스팔트 위에 잠든 듯이 모로 누운 익숙하고도 그리운 얼굴.
남자는 그 곁에 주저앉아 무너져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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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가 들려온다.
부르는 목소리가. 언제까지나 곁에 있겠다고 약속했던 소중한 사람의 목소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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