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머리가 아팠다. 이마에 손을 대보니 약간이지만 열이 있었다.
열
로우 위 x 슈톨렌
이불을 걷고 일어나 시계를 봤다.
아직 시간이 남아있지만 준비하는데 드는 시간까지 계산하면 그렇게 여유있는 정도는 아니었다.
슈톨렌은 비척비척 욕실로 향했다. 등부분이 땀으로 젖어 찝찝한 런닝과 팬티를 벗어 세탁물을 모아두는 바구니에 넣고 사워실로 들어갔다.
수도꼭지를 돌리자 전날에 전환해두지 않은 탓에 머리 위에 걸려있던 샤워기에서 물이 쏟아져내렸다.
그것도 하필이면 찬물이다. 소스라치게 놀라 수도꼭지를 잠궈보지만 이미 늦었다.
쫄딱 젖은 몸으로 덜덜 떨면서 우선 샤워실에서 나왔다. 보일러를 켜두는걸 깜빡했다.
수건으로 대충 물기를 닦아내고 어깨에 걸친 뒤 방까지 걸어와서 벽에 붙은 보일러를 온수모드로 틀어놓고 샤워실로 다시 돌아왔다.
덜 닦인 물이 흘러내려 바닥에 점점이 떨어졌다. 나중에 닦아야지. 생각만 하고 재체기를 하며 따뜻한 물을 틀었다.
드라이기로 말릴 것도 없는 짧은 머리의 물기를 마른 수건으로 털어내고 옷장에서 대충 꺼낸 옷들을 걸친다.
서늘한 곳에 둔 탓인지 몸에 닿는 천의 감촉은 차갑기만 하다. 평소에 입던대로 칠부 바지에 반팔 후드티를 입었다가 오한이 들어서 긴 소매옷으로 바꿔입었다.
아침 식사를 할까 하다가 준비에 생각보다 시간이 걸려서 그냥 나가기로 하고 문을 나섰다.
걸어서 협회까지 가는 길은 꽤 가까운 편이었다. 애초에 주거지를 선택할때 제일 우선한 조건이 '협회 건물에서 가까운가' 였으니 당연한 이야기겠다.
가을이 슬슬 끝나가기 때문인지 얼마 전까지만해도 시원하게 느껴졌던 바람이 목덜미를 스치자 소름이 돋았다.
슈톨렌은 몸을 움츠리고는 손을 후드 앞주머니에 넣고 빠른 걸음으로 협회 건물까지 걸어갔다.
로우 위의 호출이 있는 날이라 평소보다 더욱 긴장한 상태로 엘리베이터를 탔다.
굳게 닫힌 문을 열고 들어가자 회의실 안의 회원들의 시선이 모두 슈톨렌 쪽으로 향했다. 몇몇과 눈이 마주쳤지만 이내 고개를 돌렸다.
아직 로우 위는 없었다. 슈톨렌은 구석진 곳으로 걸어가 벽에 몸을 기댔다. 벽은 차가워서 이마를 대고 있으면 지끈지끈한 두통이 조금은 사그라드는것 같았다.
벽에 이마를 댄채 눈을 감고있다가 문이 열리는 소리에 뒤돌아 봤다. 언제나처럼 단정한 차림새의 로우 위가 들어오는 모습을 보고 슈톨렌은 구부정하던 자세를 바로 했다.
똑바로 서서 목소리가 조금이라도 더 잘 들리는 곳, 로우 위가 이동한 방향으로 다가갔다.
로우 위는 리하이의 처치에 실패한 바오산과 쓰마오에게 들은 보고를 모두에게 말하고 다음에 누가 갈지 지원자를 받았다.
내가 가고 싶은데. 라고 잠시 생각했지만 머리가 지끈거려서 로우 위의 이야기에 집중할 수 없었다.
이런 열따위 충성심으로 잊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참으려 했지만 지끈거림이 심해지자 점점 다리에 힘이 빠져 전신이 후들후들 떨렸다.
겨우 로우 위의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버티긴 했지만 로우 위가 한 말의 내용의 대부분이 기억에 없었다.
해산 선언과 함께 회원들이 하나둘 씩 회의실에서 나가고 쓰러지지 않는다는 당면의 목표를 달성했다는 안도감에 슈톨렌은 몸에서 긴장을 풀었다.
순간 그대로 무릎이 꺾일 뻔하고 다시 전신을 긴장시킨다. 그러고보니 로우 위님이 뭐라고 하셨더라.
하나도 떠오르질 않는다. 다른 누구에게 물어 보려는 엄두도 나질 않아 고민하던 중, 슈톨렌의 눈앞에 갑자기 흰 물체가 나타났다.
흰 물체가 설풋 슈톨렌의 이마에 닿고 그 차가운 감촉에 슈톨렌은 소스라치게 놀라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다가 다리에 힘이 빠져 뒤로 나자빠졌다. 분명 다음 순간에는 꼴사납게 바닥을 구를 예정일테다. 하지만 그 순간은 몇 초가 지나도 오지 않았다.
무의식적으로 고통에 대비해 감았던 눈을 뜨자 바로 눈앞에 로우 위의 얼굴이 있었다.
슈톨렌은 등에 둘러진 단단한 팔과 슈톨렌의 한쪽 팔을 붙잡은 로우 위의 손을 보고 넘어지기 전에 붙잡아 주었다는 걸 깨달았다.
슈톨렌은 눈 앞에 있는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바라봤다.
긴 속눈썹이 깜빡거리며 회색에 가깝지만 연한 보랏빛이 담긴 눈동자 위에 장막을 드리웠다.
색소 옅은 입술이 몇 번인가 달싹이며 말을 하지만 슈톨렌의 귓가에는 이상하게 웅웅거리는 소리로 변환된 채 들려온다.
얼굴이 점점 가까워진다. 머리가 이상해진걸까. 로우 위의 입이 눈이 코가 흰 피부가 한데 뒤섞여 뿌옇게 흐려지다 나중에는 흰색만 남아버렸다.
귓가에 웅웅거리며 울리는 이명을 들으면서 슈톨렌은 깊은 수렁으로 떨어졌다.
슈톨렌을 제외한 회원들이 모두 밖으로 나가고 문이 닫혔다.
회의실보다는 카페에 더 어울릴 것 같은 우아한 곡선의 의자에 앉은 로우 위가 넥타이를 조금 풀고 어깨에 힘을 뺐다.
로우 위는 멍한 얼굴로 아직도 회의실 한쪽 구석에 서있는 슈톨렌에게 무슨 할 말이 남아있냐고 말을 걸었다.
평소라면 재깍재깍 돌아왔을 대답이 없자 로우 위는 의아한 표정으로 슈톨렌의 근처로 걸어갔다.
로우 위가 거의 눈앞까지 다가올 때까지도 슈톨렌은 인기척에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어딘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 손을 뻗었다.
슈톨렌이 이마에 닿은 흰 손에 소스라치게 놀라 뒷걸음질쳤다.
잠깐 닿았을 때의 뜨거운 감촉에 로우위가 놀랄 틈도 없이 슈톨렌은 불안정하게 흔들리다가 그 자세 그대로 뒤로 넘어지고 있었다.
로우 위는 넘어지고 있는 슈톨렌의 팔을 잡아 자기 쪽으로 당기고 다른 팔로는 등을 받쳤다.
눈을 질끈 감은 슈톨렌이 잠시 후에 눈을 떴다. 반쯤 감긴 눈으로 멀뚱멀뚱 로우 위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는 슈톨렌에게 로우 위가 말을 걸었다.
하지만 대답은 없고 로우 위는 모자란 손을 대신해 슈톨렌의 이마에 이마를 댔다. 역시 열이 있는 모양이다.
닿아있던 이마를 떼고 얼굴을 봤을 때는 이미 슈톨렌은 눈을 감은 채로 로우 위의 팔 안에 늘어져 있었다.
그대로 두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이라 로우 위는 슈톨렌은 안아들었다. 분명 이 층에는 휴식실이 있었을 테다.
머리 속으로 건물의 도면을 떠올리며 로우 위는 걸음을 옮겼다.
정신을 잃은 사람은 평소보다 더 무거워진다고 한다.
로우 위는 자기 팔에 가해지는 무게가 성인 남자 한 사람이라는 걸 떠올리곤 새삼 너무 가볍다는 느낌이 들었다.
두뇌파라고 해도 로우 위는 회원. 일반인보다 어느 정도 뛰어난 신체를 가지고 있다. 그러니 바움쿠헨정도의 덩치라도 들쳐메고 이동하는것 정도야 그리 힘들진 않지만...
자신이 회원이 아니더라해도 그렇게 힘들지 않았을 것 같다고 생각 할 정도로 슈톨렌을 든 팔에는 그리 부담이 가지 않았다.
등에 두른 손에 옷감 아래의 도드라진 뼈가 만져졌다. 근육은 커녕 살도 그닥 만져지지 않는 마른 몸은 누군가를 지키기엔 조금 못 미더운 감이 없잖아 있었다.
이런 작고 좁은 등으로 로부스타의 총격을 받아냈던 걸 떠올리면 신기하기까지 하다. 이런 말, 본인에게 하면 표정에 드러나게 침울해하겠지.
눈썹을 찌푸리고 눈을 내리깔고 입을 꽉 다문 채로 마치 혼이 난 아이처럼 풀이 죽어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슈톨렌을 떠올라 웃음이 나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이동하는 동안 몇 몇 회원과 마주쳤다.
보통 공주님 안기라고 칭하는 포즈로 안긴 채로 정신을 잃은 슈톨렌에게 시선을 두다가 로우 위와 눈이 마주치고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긴 복도를 걸어 휴식실로 향했다. 침대가 늘어서있는 휴식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용하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인지 깨끗하게 정돈된 시트에서는 나프탈렌 냄새가 났다.
로우 위는 입구에서 제일 먼 곳에 있는 창가의 침대에 슈톨렌을 눕혔다. 안고 오는 동안 깨달은 거지만 심하게 땀을 흘리고 있었다.
로우 위는 잠시 생각하다가 약선반에서 감기약을 꺼냈다. 우선 해열제면 되겠지.
열이 나는 것 외의 다른 증상은 알 수 없어서 해열제만 꺼내 비치되어 있던 철제 쟁반 위에 올렸다.
선반의 아래쪽을 열자 잘 개어진 수건과 컵, 접시나 전기 포트같은 잡다한 용품들이 들어있었다. 로우 위는 흰 수건을 하나 꺼내 세면대에서 적신 뒤 물을 짜냈다.
조금 차가울지도 모르겠군. 중얼거리며 쟁반과 함께 들고 침대 곁으로 갔다.
로우 위는 슈톨렌이 찡그린 표정으로 끙끙거리는 모습을 보며 겉옷을 벗어 의자에 걸쳤다. 간이 테이블에 쟁반과 수건을 올려두고 슈톨렌을 감싼 이불을 걷어냈다.
한기가 드는지 몸을 움츠리는 슈톨렌의 등을 받쳐 몸을 일으켰다. 허리께의 옷감을 잡고 들어올리자 살도 근육도 별로 없는 마른 배가 드러났다.
한 손만을 쓰기 때문인지 땀에 젖어 달라붙은 옷 탓인지 생각보다 긴 시간을 소요한 후에야 로우 위는 슈톨렌의 머리에 걸린 옷을 벗기는데 성공했다.
한 팔로 몸을 지탱해 앉히고 땀으로 끈적끈적해진 슈톨렌의 등에 수건을 대자 움찔하고 경련하듯 몸이 떨리고 다시 잠잠해졌다.
수건으로 몸을 닦고 선반에서 발견한 흰 티셔츠를 입히고 나서야 로우 위는 한숨 돌렸다. 생각 이상으로 힘들군.
적신 수건을 슈톨렌의 이마에 올려두고 냉장고에 뚜껑도 연적 없는 생수를 꺼내 전기 포트에 붓고 버튼을 눌렀다.
커피협회 답게 당연한 듯 준비된 그라인더와 드립퍼에는 먼지 하나 없었다. 로우 위는 찬장에서 원두를 꺼내 익숙한 손놀림으로 갈아냈다.
포트에서 하얀 증기가 올라왔다. 포트는 온도 조절이 안되서 그닥 좋아하지 않지만.. 가스렌지가 없으니 어쩔수 없었다.
거름 망을 씌운 드립퍼에 물을 붓자 아래 놓인 커피잔에 맑은 커피가 고이기 시작한다.
인공적이고 무채색이던 공간을 커피향이 감싼다. 익숙한 향이 나는 것 만으로도 한결 편안한 장소처럼 느껴진다.
로우 위는 도구를 정리한 뒤, 드랍된 커피가 담긴 잔을 들고 침대 가의 의자에 앉았다.
슈톨렌은 여전히 눈을 뜨지 않았다. 헉, 헉, 하고 짧은 숨을 들이쉬고 내쉬길 반복하는 모습을 본다. 이불이 숨쉬는 속도에 따라 오르락내리락한다.
다른 일이 있었던 것 같아 머리속으로 계산해 보다가 로우 위는 생각을 멈췄다.
닫힌 창문에서는 정오의 따뜻한 햇살이 스며들어와 휴게실 안은 따뜻했다. 햇살이 슈톨렌의 얼굴 위로, 손 위로, 몸 위로 내리쬔다.
날씨가 좋군. 가끔은 이런 일탈도 나쁘지 않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로우 위는 커피를 입에 댔다.
2012.5.5 홈페이지 백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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